가난의 경로 동자동 그후 10년 ② 무연
sans339
2025-12-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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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경로 동자동 그후 10년 ② 무연고 처리되는 사망자들노란집 강제퇴거 뒤 사망 13명 중가족이 시신 인수한 고인은 2명뿐전국 무연고 사망자 5년새 두배로주거 조건만큼 중요한 ‘죽음의 자리’10년 전 ‘노란집’(서울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제퇴거 당한 주민 박철관(가명)씨가 지난 11월10일 친구의 방에서 그가 남긴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6월 그는 베개에 피를 토한 채 사망한 친구를 사흘 만에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문영 기자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가난의경로 10년 ①증발하는 사람들 에서 이어집니다)(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그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동자동(서울시 용산구)엔 아무도 없었다.“아냐, 아냐, 그럴 리 없다니까.”‘노란집’(쪽방 건물)에 살던 10년 전 박철관(가명·87)과 최중호(가명·69)는 2층 첫 방과 마지막 방의 세입자였다. 박철관에게 최중호는 “징글징글한 웬수”였다. “인생 똑바로 살라”고 욕은 했지만 끝내 외면하진 못했다. 2015년 ‘강제퇴거 사태’로 그 집 주민 45명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최중호는 ‘철관 형님’에게 매달렸다. “출소하면 찾아갈 테니 내 짐 좀 맡아달라”고 옥중 편지를 써서 간청했다. “나오기만 해보라”며 치를 떨면서도 박철관은 자신의 작고 좁은 방으로 최중호의 짐을 끌고 들어갔다. 최중호가 출소했을 땐 건물주에게 말해 옆방을 얻어줬다.그 방에서도 최중호는 수감과 출소를 ‘중독처럼’ 반복했다. 며칠 안 보인다 싶으면 그의 구치소 수감을 알리는 문자가 박철관에게 날아왔고, 형기를 채운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박철관에게 왔다. ‘사태 5년’ 되던 2020년에도 최중호는 교도소에 있었고, 10년을 채운 지난 10월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박철관은 그가 교도소에 있는 줄 알았다. “들어간 지 1년쯤 됐으니 찾아올 때가 머지않았다”고 날짜를 꼽던 박철관은 “그 웬수가 ‘나왔다’는 말도 없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나한테가난의 경로 동자동 그후 10년 ② 무연고 처리되는 사망자들노란집 강제퇴거 뒤 사망 13명 중가족이 시신 인수한 고인은 2명뿐전국 무연고 사망자 5년새 두배로주거 조건만큼 중요한 ‘죽음의 자리’10년 전 ‘노란집’(서울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제퇴거 당한 주민 박철관(가명)씨가 지난 11월10일 친구의 방에서 그가 남긴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6월 그는 베개에 피를 토한 채 사망한 친구를 사흘 만에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문영 기자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가난의경로 10년 ①증발하는 사람들 에서 이어집니다)(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그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동자동(서울시 용산구)엔 아무도 없었다.“아냐, 아냐, 그럴 리 없다니까.”‘노란집’(쪽방 건물)에 살던 10년 전 박철관(가명·87)과 최중호(가명·69)는 2층 첫 방과 마지막 방의 세입자였다. 박철관에게 최중호는 “징글징글한 웬수”였다. “인생 똑바로 살라”고 욕은 했지만 끝내 외면하진 못했다. 2015년 ‘강제퇴거 사태’로 그 집 주민 45명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최중호는 ‘철관 형님’에게 매달렸다. “출소하면 찾아갈 테니 내 짐 좀 맡아달라”고 옥중 편지를 써서 간청했다. “나오기만 해보라”며 치를 떨면서도 박철관은 자신의 작고 좁은 방으로 최중호의 짐을 끌고 들어갔다. 최중호가 출소했을 땐 건물주에게 말해 옆방을 얻어줬다.그 방에서도 최중호는 수감과 출소를 ‘중독처럼’ 반복했다. 며칠 안 보인다 싶으면 그의 구치소 수감을 알리는 문자가 박철관에게 날아왔고, 형기를 채운 그가 교도소 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박철관에게 왔다. ‘사태 5년’ 되던 2020년에도 최중호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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